지난 연말,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느새 그 활기가 내게까지 전해져오는 아주 특별한 재주를 지닌 선배로부터 재미있는 글귀가 날아왔다. 맑아서 더욱 빛이 나는 그녀의 열정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았었고, 지금도 내게 그녀와의 만남의 시간들은 언제나 그립고 또 기다려지는 순간들로 기억되어 있다. 그 선배가 가볍게 던져준 구절 역시 내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순간을 가져다 준 새해의 값진 선물이 되었다.
“시간은 우리에게 독재자이거나 구세주이거나”란다. 시간이란 게 꼭두각시인 우리들 위에 제 멋대로 군림하는 ‘독재자’이거나 이 ‘독재자’를 한방에 날려버리고 자유와 기쁨을 안겨다 줄 ‘구세주’이거나 라니… 문득 우리네 세상살이 또한 그 양면성이 이와 같은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 기발한 표현에 한바탕 실컷 웃을 수 있었다.
물론 2008년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밀려온 시간을 마지못해 맞이하면서 이 ‘독재자’와 ‘구세주’를 그새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15년 전쯤이다. 나의 ‘수호천사’라 굳게 믿고 어릴 적부터 졸졸 그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오빠의 죽음으로 한참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시작한 열병은 결국에는 내 인생을 통째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 갖가지 생채기를 내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이 책 저 책을 읽다 알아낸 사실이지만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부정, 분노, 협상, 우울, 그리고 순응이라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고스란히 겪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결코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그 깜깜한 혼란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고, 그 길을 찾는 법 또한 어느 정도 터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여러 고비들을 그럭저럭 넘겨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때 나름대로 다져진 맷집 덕분이지 싶다.
그런데 이제 그 약발이 다한 것일까? 지난해 말, 언제부터인지 반갑지 않은 증세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괜스레 툴툴거리고, 평소엔 전혀 흥미 없던 신데렐라 스토리를 골라 보며 신세타령을 하지를 않나, 이것저것 아무 때나 막 주워 먹고선 몸이 불었다 짜증내고, 집안 쓰레기는 쌓이고, 점점 더 무기력해져만 가고… ‘갱년기인가?’ 전에도 가끔씩 하던 짓이니 전처럼 조금하다 추슬러지기를 기다려 보았지만 이번엔 증세가 만만치 않았다. 마음이 잡히지도, 잡고 싶은 마음도 보이지를 않았다.
헌데 이렇게 심난한 와중에도 새로워야 할 것만 같은 새해는 어김없이 나에게 들이닥쳤고, 해결보지 못한 우울한 마음인 채로 마지못해 억지스런 앵무새 다짐을 해야만 했다. ‘새해에는… 새해에는… 새해에는…’ 엉클어진 마음 위에 한동안 이 ‘새해 주문’을 외워댔다. 시간은 분명 선배가 말한 잔인한 ‘독재자’임이 확실했다.
그래도 계속 외워댄 덕분일까? 이 의미 없는 ‘주문’도 나름대로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듯했다. 친구가 한참 전에 선물해 준 영성 서적에 슬그머니 다시 손이 갔다. ‘스토아 철학’이니 ‘초인격 심리학’이니 ‘신비주의’니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자 뭔가 기초지식을 닦아야 할 것 같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놓아버렸던 책이었다. 머리로 접하려다 실패했던 이 책에 이번에는 가슴이 한없이 푸욱 빠져 들어갔고 어느새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체증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울하고 어둡던 내 마음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 빛을 찾아가는 길 또한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새해가 ‘구세주’인 셈이다. 그리고 ‘구세주’라 느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고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독재자’로 다가올지 모르는 ‘절대 시간’이나 ‘절대 세상살이’들이 나의 시간과 나의 삶 안에서는 ‘구세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덕에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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