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맹주 이집트를 30년간 지배해온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의 전격적인 퇴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두려움 없는 투쟁과 인내심으로 얻어낸 `과실’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처음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지난달 25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현지인뿐 아니라 국제사회조차도 ‘살아있는 파라오’로 불리던 무바라크가 등 떼밀리듯 퇴임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집트인들은 지난 30년간 무바라크 체제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정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함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억압된 생활을 감내해왔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빈부 격차와 하루가 다르게 치솟기는 물가 속에 변변한 일자리마저 구할 길 없는 시민들의 분노는 지난달 초 튀니지의 정권을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에 자극을 받아 폭발했다.
사상 초유의 대규모 시위로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고 5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두려움의 벽을 허문 이집트 시민들은 카이로 시내의 타흐리르 광장을 민주화 쟁취의 보루로 삼아 무려 18일 동안이나 무바라크 퇴진 시위를 전개했다.
정권과의 타협을 거부한 수천 명의 시민들은 해방이라는 뜻의 이 광장에 간이 천막과 텐트 등을 친 채 친정부 세력의 폭력적 공격 행위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의 불씨를 지켰고, 그 불씨는 30년 된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해져 갔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지난 1일 밤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10일 밤에는 자신의 권력 일부를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이양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았으나 즉각적인 사퇴 요구는 거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날 그의 사임이 발표되기 직전 타흐리르 광장에는 사상 최대인 100 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했고,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도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가두행진을 벌이는 등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더이상을 억누를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결국 무바라크는 카이로의 대통령 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홍해휴양지 샤름 엘-세이크로 떠나게 됐다.
무바라크가 퇴진한 권력의 빈자리는 일단 이집트 국민의 신뢰가 두터운 군이 채우게 됐다.
이번 시위 사태 속에서도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은 채 정치적 중립을 지킨 군은 무바라크의 퇴임을 앞두고 이른바 `코뮈니케’ 1호와 2호 성명을 통해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올해 하반기에 대선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지도록 보장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군은 또 이번 시위 사태가 잦아들면 30년 된 비상계엄령도 해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권력이양기에 개혁 조치가 순조롭게 이행될 수 있도록 하는 관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집트 현 체제와 야권 단체는 개헌위원회를 구성, 야당 인사들의 대선 출마와 정당 결성의 자유를 억압해온 헌법 조항을 고치거나 삭제하고, 대통령의 연임 제한 규정을 신설하기로 합의한 바 있어 과도기에 이런 작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집트에 만연한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한 청산 작업도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이집트 검찰은 최근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각료 3명과 집권당 고위 인사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바 있다.
하지만, 중동 지역 시민혁명의 신호탄을 쏜 튀니지에서 구정권 인사들의 과도 정부 참여 문제 등에 따른 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앞날에도 많은 굴곡이 예상되고 있다.
우선, 과도 권력을 넘겨받은 군이 순순히 민간에 권력을 다시 넘겨줄지 불투명하다. 사회혼란이나 부정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군부가 민간에 권력을 되돌려주지 않은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기 때문이다.
이번 시민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는 청년 실업이나 고물가 등은 새로 들어설 체제가 짧은 시일 내에 풀어내기 어려운 난제이기 때문에 서민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민생 시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이집트 정계에서는 대대적인 개편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30년 넘게 여당의 지위를 누려온 국민민주당(NDP)은 혹독한 체질 개선에 나서거나 해체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NDP의 호삼 바드라위 사무총장은 이날 "현 단계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 당이 필요하다"며 사무총장직의 사임을 발표하고 탈당해 정계 개편의 서막을 알렸다.
이집트의 최대 야권 그룹인 무슬림형제단은 1954년 정부에 의해 불법 조직으로 규정된 이후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합법 정당을 출범시키며 수권 세력으로 발돋움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월 제8대 최고지도자에 오른 모하메드 바디에는 무슬림형제단을 합법 정당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이 조직의 정치 세력화는 이집트 내 세속주의자들뿐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 등 서방권을 긴장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이집트 현지 언론사인 움마프레스의 아흐메드 샤즐리 편집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현 상황에서 우려되는 것은 단 하나"라며 "그것은 군이 지나치게 오랜 기간 권력을 쥐며 민간인들의 정치 참여를 억압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러나 군은 군사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국민은 믿고 있다"며 "앞으로 이집트에서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은 가운데,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정치가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카이로=연합뉴스) 고웅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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