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강도에 총격 사망, 험난한 유년기 이겨내
포스터시티 시의원 당선 등 태권도로 일군 ‘인간승리’
1950년대 말 뉴욕 맨해튼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와 도망쳐 나와 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뉴욕에서 뉴저지로 이사했을 당시가 9살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긴 머리에 차림새가 다르고 새로 이사 왔다는 이유로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 마다 앞만 보고 도망쳤다. 그렇게 괴롭힘을 피해 매일같이 달렸고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달리기도 도망치기도 싫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 평생 도망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자신을 지킬 정도로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강해졌다.
불우하고 가난했던 가정환경을 딛고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권도 금메달을 따낸 허브 퍼레즈(Herb Perez·53)의 이야기다.
1959년생인 퍼레즈는 9살 때 처음 뉴욕의 커뮤니티 센터에서 토니 아베라즈라는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웠다. 아베라즈는 김기창 관장의 문하생으로 김 관장은 미국에 태권도를 보급한 사범 중 한명이었다.
그는 뉴저지에서 Kim’s 태권도를 운영했고, 1965년 한국 대학태권도 미들급 챔피언과 1967년 전국 태권도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실력자였다. 또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나온 재원이기도 했으며, 퍼레즈를 비롯해 마크 윌리엄스, 케이스 켈리 등 미 유명 태권도인들을 배출했다.
퍼레즈는 운명처럼 뉴저지의 오렌지에서 김 관장을 만났다.
“태권도가 격투기다 보니까 다쳐도 책임 안 진다는 부모의 서명을 받아 오라고 하더군요. 어머니의 서명을 가짜로 해서 등록을 했어요. 그게 첫 만남이었죠. 어렸을 때 헤어진 아버지가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 때가 16살 이었죠. 부정이 그리웠던 저에게 그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죠.”
당시 그는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로 주급 20달러를 받았다. 이중 5달러는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드려 생활비에 보탰다. 나머지 7달러는 기타레슨, 4달러는 태권도, 남으면 용돈이었다.
돈에 쪼들리다 보니 태권도 레슨비를 못 내는 경우가 많았다. 1년을 못 낸 적도 있었지만 김 관장은 “다음에 내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방황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하루가 멀게 싸움을 했다. 하지만 싸움으로 채워지지 않는 응어리가 마음속에 있었다.
한번은 시합에서 동료와 다투고 김 관장한테 혼이 난 후 도장에 한 달 동안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도장에 갔지만 김 사범은 1년 동안 그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관장님이 절 부르더군요. 30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셨어요. 급기야 전 고해성사하는 사람처럼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주절주절 끄집어내며 잘 못한 점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관장님은 그런 저에게 ‘진정한 남자가 되려면 교육을 잘 받아야하고, 경험을 쌓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널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 이후부터 퍼레즈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됐고, 더 이상 싸움도 하지 않았다. 태권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낸 퍼레즈는 당시 26세였던 1986년, 액션배우로 이름을 날린 척 노리스 등이 우승한 올 아메리칸 대회에서 챔피언에 올랐다. 올 아메리칸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태권도, 쿵푸, 가라테 선수들이 승부를 벌이는 유명 토너먼트이다.
미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7번, 1987년과 1991년 세계대회 동과 은메달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또 1987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팬암(Panam) 태권도 선수권대회에서 챔피언에 올랐다.
우승컵을 손에 쥐 그날 퍼레즈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다 저편 스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장님 이겼어요, 제가 금메달을 땄어요’하고 소리를 질렀죠. 그러자 관장님은 ‘집에 돌아오면 보자꾸나’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시는 겁니다. 그분은 항상 그러셨어요. 우승하면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패하면 뭐가 문제인지 한참을 말하곤 했죠. 말투는 항상 그랬지만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죠.” 1992년 그의 나이 32세, 꿈에 그리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해 미 올림픽 위원회에서 선정한 태권도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태권도인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6차례 미 태권도 국가대표팀 주장을 비롯해 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을 10년간 역임 했고 위원장도 했다. 또 2005년에는 세계태권도 연맹(WTF)의 미국 대표로 선임됐고 올림픽 성화 봉송주자로 뛰는 영광도 누렸다. 작년 9월경에는 미 태권도협회 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11년 11월 치러진 선거에서 포스터시티 시위원에 당선돼 시의원도 됐다.
현재 퍼레즈는 포스터시티와 벌링게임, 밸몬트에서 ‘골드 메달’(Gold Medal)이라는 태권도 도장을 3개 운영하고 있다. 문하생이 3군데 합쳐 1,200명에 달한다.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교를 나왔고,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태권도가 있었기 가능했습니다. 태권도는 제 인생을 바꿨고 특별하고 값지게 만들어줬습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법도 가르쳐주었죠.”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1996년 사망한 아버지 같았던 검은 머리의 과묵한 스승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인생에서 헛갈릴 때 내 스승은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제 유년기는 험난했지만 포기할 줄 몰랐고 극복했습니다. 곁에 태권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제가 배운 태권도와 정신을 나룰 차례입니다.”
<김판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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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포스터시티에 위치한 골드메달 도장에서 허브 퍼레즈 관장이 어린 관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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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딴 태권도 금메달과 직접 들고 뛰었던 올림픽 성화봉 옆에서 퍼레즈 관장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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