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한 친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유가족이 베푼 식사 자리에서 친구들과 나눈 화두였다. 고인은 개인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잘 키워 ‘잘 살다’가 떠난 재력가였다. 고인의 동향 친구가 “고인은 ‘웰빙’ 하시다 ‘웰다잉’ 하셨으므로 이 세상에 별로 여한은 없을 것”이라고 요즘 유행어를 인용해 조사를 했다.
우리는 고인을 기리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눴는데 ‘웰빙’과 ‘웰다잉’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 친구가 “그거 쉬운 말로 ‘잘살다’가 ‘잘 죽었다’ 아냐?” 한마디 해서 좌중을 웃겼다. 화제는 동사인 ‘살다’와 ‘죽었다’를 수식하는 부사 ‘잘’의 의미에 모아졌다.
복합어인 ‘잘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다’이다. 고소득, 호화주택, 고급차, 명품 따위로 채워진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연상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망하는 삶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물질적 풍요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는 속담을 입에 달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돈벌이에 매달렸다. 미주 한인사회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이제 살만해지니까 국민들도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물질적 풍요가 목표인 ‘잘살다’의 의미를 재조명해보며 사회적, 정신적, 영적 풍요를 아우르는 웰빙 바람을 통한 삶의 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어찌 물질적 풍요로만 충족될 수가 있겠는가?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인 ‘잘’의 용도는 아주 다양하고 그 의미는 참으로 풍요롭다. 한 글자로 된 단어치고 ‘잘’처럼 유용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마음을 ‘잘’ 쓰라”면 “마음을 ‘바르고 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잘 봐 달라”에서 ‘잘’은 ‘친절하고 성의 있게”라는 뜻이요, “수박이 ‘잘’ 익었다”면 수박이 ‘어떤 기준에 꼭 맞게’ 익었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잘’은 익숙하고 능란하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어렵지 않게, 만족스럽게, 편하고 순조롭게 등 다양한 의미를 따분하고 단조로운 행위에 덧입혀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잘’이 ‘살다’에 붙어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로 제한돼 버렸다. 웰빙은 복합어 ‘잘살다’를 두 단어 ‘잘’과 ‘살다’로 갈라 ‘잘 살다’로 만들어 ‘잘’의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를 ‘살다’에 접목시키는 사회운동이 아닐까 한다. ‘잘 살다’는 ‘재산과 관계없이 바르게, 훌륭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잘살다’ 죽어도 ‘잘 죽었다’는 치사(?)를 듣기가 어렵다.
웰빙에 이어 유행어가 된 ‘웰다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자는 것이다. ‘잘 죽기’라고 알기 쉽게 써도 될 듯싶은데 굳이 웰다잉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죽음’이 공포와 외면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금기어인 탓 같다. ‘잘 죽었다’ 소리를 하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낼 판이다. 모두 거쳐 가는 관문인 죽음이 왜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걸까?예일대 철학과 셸리 케이건 교수는 내가 최근 읽은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죽음은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박탈이론’을 토대로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앗기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케이건 교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리론자이다. 나는 그의 이론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웰빙과 웰다잉 곧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별개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한 영혼들에게 손을 잘 내밀 줄 아는 등 잘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웰빙이요, 웰빙의 도착역이자 마침표가 곧 웰다잉 아닌가. 나도 좀 잘 살다가 잘 죽었다 소리를 듣고 싶은데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묘비명을 남기면 사람들이 너무 튀었다고 하거나 웃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 잘 살다가 잘 죽어 여기 누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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