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오랜 세월 추억 속에 묻혀 까맣게 잊혀졌던 빛바랜 주홍빛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봉숭아물 맞지요?” 나의 물음에 육순을 바라보는 친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10대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손톱은 매니큐어 대신 주홍빛 추억과 동심으로 곱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녀는 여름방학을 맞은 여덟 살 손녀와 강원도 고향집을 다녀왔다. 고향집 마당에 들어서자 정겨운 봉숭아꽃이 손녀를 이끌고 온 할머니를 반갑게 맞았다. 옛 추억을 더듬어가며 손녀를 달래 함께 봉숭아물을 들였다는 친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나의 옛 추억이 아롱다롱 곱게 피어올랐다.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그 해 여름 나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겠다는 이웃집 중학생 누나의 꼬드김을 받았다. 고운 주홍빛 손톱을 내보이며 꾀는 예쁜 누나에게 나는 선선히 내 두 손을 내맡겼다. 누나는 집에 갔다 온다더니 언제 준비했는지 봉숭아꽃과 잎, 콩 잎, 백반, 작은 종지, 매끈한 차돌과 실을 들고 나타났다.
해질 무렵 누나와 나는 우리 집 댓돌 위에 나란히 앉았다. 누나는 익숙한 솜씨로 봉숭아꽃과 잎 그리고 백반을 종지에 넣고 찧기 시작했다. 잘게 짓이겨진 봉숭아를 내 손톱에 조심스레 얹고 콩 잎으로 싼 뒤 실로 단단히 싸매 주었다. 열 손가락을 마쳤을 때에는 어느새 땅거미가 마당에 짙게 내려와 있었다.
“잘 때 빠지지 않게 조심해. 이불에 얼룩지면 엄마한테 혼나. 알았어?”누나는 경고의 표시로 눈을 살짝 흘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어떻게 엄마의 눈에 띄지 않게 두 손을 감추고 잠자리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잠을 몹시 설쳤고 다음날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마당에 나가 열 손가락의 매듭들을 모두 풀어헤쳤다. 주홍물이 손톱 밖으로 번진 것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나는 신이 났다. 누나와 친구들에게 곧장 달려가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홍 손톱은 자랑거리는커녕 대번에 동네 사내애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사내자식이 계집애처럼 손톱에 물을 들였다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한동안 나는 손톱을 감추느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녔다. 마치 나를 놀려대는 녀석에게 한 방 올려붙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누나는 내 손톱이 예쁘다며 달랬지만 나는 손톱만 보면 누나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속이 상하면 손톱을 흙에 비벼댔다. 손톱이 자라나면서 보름달이 이울듯 봉숭아물은 누나에 대한 원망을 싣고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내가 봉숭아로 물들인 주홍빛 손톱과 다시 조우한 것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던 1969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귀가 중 모 여대 배지를 단 여대생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수업을 마친 뒤 가정교사로 남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파김치가 되어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가물거리던 내 눈에 옆자리 여대생의 빨간 손톱이 들어왔다. 이미 매니큐어가 여대생들에게 일상화되어 빨간 손톱을 보면 으레 매니큐려니 여기던 때였다. 그런데 좀 자세히 훔쳐보니 흔히 보는 빨간 색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정겨운 색깔이었다. ‘봉숭아물?’한눈을 파는 바람에 나는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쳤다. 마침 그 여대생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고 나도 서둘러 따라 내렸다. 앞서가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뒤돌아선 그녀는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나를 알아본 듯 곧 경계의 빛을 풀었다.
“손톱 색깔이 예뻐서요. 봉숭아물 맞지요?”나의 질문에 그녀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나는 꾸벅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나의 언행에 실망을 했는지 혹은 기분을 상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기분은 상쾌했다.
요즘 같이 인조와 인스턴트가 판치는 바쁜 세상에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유유자적하는 여심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여심을 그리는 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옛 추억은 메마른 오늘의 정서를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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