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의 영달 취하지 않고 목회와
▶ 조국의 독립위해 가시밭길 걸어
일제강점기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 목사 겸 대한인국민회 의장
임정구(Chung Koo Yim)
조국 독립위해 몸 바친 미주 한인사회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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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국정부로부터 11월 17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 임정구 목사에 대해 버클리대학 방문학자로 와있는 조규태 교수가 보내온 특별기고문이다. 조규태 교수는 지난 4월부터 버클리대학에 체재하면서 미주지역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연구에 전념하고 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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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의 목사이며 대한인국민회 의장과 부회장 등으로 활약한 임정구선생이 2013년 11월 17일 제74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임정구선생은 1887년 음력 10월 25일 평남 강서군에서 가난한 상인(商人)인 임성도와 채성덕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차별받던 서북지역의 가난한 평민의 아들로 출생한 임정구는 신분제를 합리화하는 유교보다 사랑과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1890년대 후반 혹은 1900년대 초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William Arthur Noble(1866~1945)을 통하여 기독교의 문에 들어섰다.
서구의 문명과 기독교의 진리를 찾아 그는 1905년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에서 노동을 하며 영어를 배운 그는 다음 해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가 학업을 위해 바로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907년 가을 로스앤젤레스 북쪽 Mission Hill에 위치한 San Fernando 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였고, 1908년 9월 로스앤젤레스 근처 클레몬트의 한인학생양성소(Pomona College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1911년 가을 Pomona College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한 그는 1914년 가을 UC Berkeley로 전학하여 경제과에서 3년 반 동안 공부하고 1917년 12월 졸업하였다. UC Berkeley를 나온 그에게 새로운 배움의 목표는 기독교의 진리를 찾는 것이었다. 1918년 9월 그는 San Anselmo에 위치한 장로교 신학교인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 한 학기 특별과정으로 입학하였다.
Acton 감리사 등의 도움으로 어렵게 학사학위과정 이수를 허락받았지만, 그는 대한인국민회 사무와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 일 때문에 한 학기 만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8년이 지난 1927년 가을 그는 Berkeley에 있는 Pacific School of Religion에 석사와 학사 연계과정으로 입학하였다. 1929년 5월 그는 <예수의 신의 왕국에 대한 개념>(“Jesus’ Conception of the Kingdom of God")이란 주제로 신약성경문학주석학과(N. T. Literature and Interpretation)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0년 5월 <한국에서의 기독교회 설립>("Building up Christian Church in Korea")이란 주제로 신학학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배운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독교 학문은 그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종교활동의 토대가 되었다. 1914년 U. C. Berkeley에 전학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온 임정구는 그 해 12월 황애성과 결혼하고 그녀의 오빠인 황사용과 황사선, 동서인 조성학의 인도로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 다녔다. 엡웟청년회에 가입하여 1915년 7월 전도국장에 임명된 그는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학술강연회를 벌이고, 소풍 등 모임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샌프란시스코 감리교회의 교인으로 송년회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5년 황사용이 관장하던 새크라멘토 서킷 내 오클랜드를 담당하는 구역 전도사(Local Preacher)에 임명된 그는 1917년에는 새크라멘토, 오클랜드, 스탁톤, 맨티카 등지를 담당하는 새크라멘토 서킷의 순행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집사안수목사(Deacon), 1921년에는 목사로 일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는 오클랜드, 스탁튼, 맨티카, 새크라멘토에 교회를 설립하거나 정비하고, 한글학교를 운영함으로써 교세를 신장시켰다. 1924년 그가 담당하던 오클랜드, 새크라멘토, 맨티카, 스탁튼 등지에는 총 134명의 교인이 있었고, 3개의 주일학교에 6명의 교사와 36명의 학생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중부 캘리포니아의 리들리에도 포교활동을 벌여 1922년 4월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신앙활동과 종교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동포의 원호와 민족의 발전과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 몸을 바쳤다. 1906년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로 활동하였고, 1908년 8, 9월 클레몬트에 한인학생양성소를 설립하고 그 간무원으로 한인학생의 학업을 지원하였다. 공립협회가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합하여 국민회, 그리고 다음 해 5월 대동보국회 등도 참여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자, 임정구는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여 평생을 바쳤다. 1910-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업랜드지방회 대의원, 1912년 클레몬트지방회 학무원, 1916년 북미지방총회 실업부원 겸 리버사이드지방회 대의원, 1917년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겸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 1918년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겸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 1919년 북미지방총회 부회장과 총회장대리, 대의원회 의장, 1920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 1922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그가 목사로 활동하던 오클랜드지역의 교인 등과 함께 오클랜드지방회를 설립하고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오클랜드지방회의 대의원, 학무원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대한인국민회총회의 부회장과 선전부장으로, 대한인국민회총회의 체제가 회장제에서 위원제로 바뀐 1937-38년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1919년 적십자북미지방총회 회장, 1932-33년 미주한인연합회 선전부장, 1933년 중한민중동맹 샌프란시스코지부 조직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한 후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과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3•1절과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기독교회 등지에서 개최된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도나 강연을 통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장인환, 이대위, 안창호, 손정도 등 독립운동가의 추도식을 진행함으로써 한인들로 하여금 이들의 삶을 되짚어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길에 나서게 하였다. 아울러 국채보상의연금, 대한인국민회의 국민의무금과 건축의연금, 『신한민보』 발간 후원금, 임시정부 후원금, 중국항일전쟁동정금, 교회와 한글학교 설립 의연금, 재만동포구제금, 국내에서 발생한 기근과 수재의 구제금 등을 1907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적으로 출연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동포를 구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6월 소화불량으로 오클랜드 하이랜드병원에 입원한 그는 위암이 확인되어 다음 달에 수술을 받았다.
퇴원 후 자택에서 요양하던 그는 1939년 12월 11일 다시 병세가 위중해져 입원하였고, 1939년 12월 28일 오후 5시 향년 53세로 오클랜드의 하이랜드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장례는 1939년 12월 30일 교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오클랜드 마운틴 뷰 세미터리(Mountain View Cemetery 5000 Piedmont Ave. Oakland)에 안장되었다. U. C. Berkeley를 졸업한 그는 마음만 먹으면 편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개인의 영달을 가져다주는 포장된 도로를 택하지 않고, 민족의 행복과 조국의 독립을 향해 나 있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또 이로 인해, 가계를 책임져야 하였던 그의 부인은 상점을 운영하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물론 그와 그 가족이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그 가족의 희생으로 광복된 나라에서 안락한 삶을 향유하는 우리들로서는 적어도 그들의 고귀한 뜻만은 잊지 말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늦게나마 임정구선생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것을 축하하며, 앞으로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인 황사용, 황사선, 조성학 등도 포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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