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 개업의들은 여러 질병을 가진 환자들을 접하게 된다. 고통에찬 아픈 얼굴로 찾아오는 그들은 고통이 사라지는 완쾌를 바라지만 의학의 한계인지 내 능력(?)의 한계인지 완쾌보다는 완화, 현상유지가 대부분이었다. 완쾌되어 웃으며 나가는 환자는 드물다. 특히 내과에는 고령과 조직의 퇴화로 세월과 함께 심신이 마모되어 병이 더욱 깊어만 가는 질환들이 많다.
오늘도 진통의 완화와 안전의 확인을 얻고 오피스를 나서는 환자를 본다. 만성병의 정기 진찰 약속을 한후 완쾌에 대한 기대는 접어서인지 떠나는 뒷모습이 발걸음부터 무거워 보인다. 치료한계의 벽을 실감하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완쾌시킬 수는 없나 생각도 해보지만 해결책은안 보인다. 의사의 마음속도 안쓰러움에 무거움만 쌓인다.
웃고 들어와 좀 더 유쾌해지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가는 손님을 접하는 직업이 무엇일까? 내가 그중 하나로 꼽은 것은 일식당의 스시맨이다. 스시바 스탠드에 마주앉아군침을 삼키는 손님에게 싱싱한 회를 맛깔스럽게 썰어주면서 바다와 자연, 음악, 미술, 문학, 스포츠와 생활 전선에 관한 유쾌하고도 가벼운 대화와 함께 술 한 잔을 나누고 헤어질 때는 흐뭇한 포만감에 발걸음도 가볍게 떠나는 사람들을 접하는 직업이라 생각한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저 건너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것이다. 은퇴 후 스시맨이 되어보면 어떨까 싶어 스시 강의도 들어보고 사시미 칼도 구입하여 생선회 뜨는 연습도 하곤 했다. 30여년 바다낚시를 하며 쌓아 온 바다와 생선에 관한 나의 오랜 경험과 지식에 더해 도움이 될 만한 생선, 건강, 의학관련 서적들도 뒤적였다. 내 미래의 스시집에선 바다 냄새가 나게 하고 싶어 바다와 생선을 모티브로 한 실내 장식품들도 틈틈이 모아 보았다.
의사의 흰 가운이 아닌 스시맨의 흰 머리 띠를 이마에 두른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나 혼자의 숨겨진 흐뭇했던 이 기간은, 그러나 현실에 만족 못하고 무언가 다른, 좀 더 먼 곳의 능력 이상을 쫒아 다니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점점 더 흰머리가 늘어가는 세월 속에 정말 내가 해낼 수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을 계속 서 있을 체력이 늙은 후에도 지탱해 줄까? 사시미 칼을 든 손이 떨림 없이 생선을 능숙하게 얇고 보기 좋고 맛있게 썰어낼 수 있을까? 손님들이 나이 든 사람보다 활기찬 젊은 사람을 더 선호하지는 않을까? 현실적인 생각들이 점차 마음 한구석을 채워 나갔다. 반대의 입장에 서면, 혹시 스시맨은 의사라는 직업에 눈길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회귀하는 현상일 것이다.
어릴 때 네잎 클로버를 찾아 들판을 해맨 적이 있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처럼 ‘행운’을 얻기 위하여 바로 발밑에 있는 수많은 세잎 클로버를 무참히 밟고 지나쳤다.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바로 ‘행복’이라고 한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행운’만을 찾으며 발밑의 ‘ 행복’을 못보고 헤매는 아이처럼, 많은 지난날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눈길을 주지 않는동안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일생동안 보이지 않는 행운을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행복을 짓밟고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실수는 없었을까? 삶 전체를 돌이켜 보게 된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금 내 옆에있는 사람”“ 지금 이 시간”“ 그리고 바로 이 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박 또박 힘차게 걸어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서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쇠약한 환자를 반갑게 대하고 성심이 담긴 노력 만에서도 만족 할수 있는 마음가짐이 새해에 갖는 또하나의 각오가 되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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