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대학교 교수인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심리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학자이다. 그가 지난 2013년 펴낸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은 진보와 보수의 뿌리를 다룬 책으로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촌철살인의 진단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판사나 과학자가 아닌, 변호사를 발달시켜 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진실’보다는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데 더 뛰어나고 더 열심인 존재라는 지적이었다.
하이트 교수의 진단은 왜 양극화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고 사회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인지 그 근본적 원인과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그리고 한때 선거 구도를 확 뒤집을 수 있을 만한 미디어 쇼로 각광과 기대를 모았던 정치인들의 TV토론 영향력이 왜 갈수록 시들해지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분석틀이기도 하다.
현대정치는 ‘미디어크라시’라 불릴 정도로 미디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미디어의 논조와 의도가 여론의 형성에 미치는 힘을 고려해볼 때 이런 진단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마지막 결정을 앞둔 시점에 벌어지는 미디어 쇼인 TV토론이 판세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미미하다. 후보자들이 토론을 벌이기 전 이미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지지후보를 정한 상태이며, 토론 성적표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지지후보의 변호사가 되기로 작정한 이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 TV토론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사상 첫 TV토론이 이뤄졌던 1960년 미국대선에서 민주당의 정치신예 존 F. 케네디가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TV토론 덕분이었다. 젊고 활기찬 모습의 케네디는 “미국은 훌륭한 나라지만 더 훌륭해질 수 있다. 미국은 강한 나라지만 더 강해질 수 있다”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닉슨을 몰아붙였다. 이에 반해 TV화면에 비춰진 닉슨은 시종 맥없고 지친 모습이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적 성공에도 TV가 한몫했다.
그러나 이후 TV토론은 이벤트로서의 주목도는 여전히 높았지만 선거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과 비교해 미미해졌다. 지난 2016년 미국대선을 보면 이런 사실이 아주 분명해 진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은 토론은 역사상 가장 많은 8,400만 명이 미국인들이 지켜봤다. 클린턴은 토론의 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최후 승자는 트럼프였다.
이렇듯 TV토론은 유권자들의 결정을 바꾸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결정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설득효과’보다 ‘강화효과’가 더 크다는 얘기다. 극단적으로 말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진 유권자들에게 TV토론은 시간낭비요 전파낭비일 뿐이다.
다만 아직까지 눈까풀이 온전한 일부 유권자들에게는 TV토론이 여전히 쭉정이를 구분하고 가려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유용성에 대한 많은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TV토론이 선거기간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갈수록 양극화, 파편화되고 있는 정치적 환경 속에서 모든 후보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비교 평가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8년 사이에 두 명의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치적 비극을 경험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이런 경험이 초래한 국가적 손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치르지 않아도 됐을 비용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탄핵 대통령들은 TV토론에서 자신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들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박근혜는 현안에 대한 낮은 이해도, 그리고 두서없는 언변과 사고체계를 드러냈다. 상대후보의 질문이나 공격에 말문이 막히면 “그래서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라는 황당한 답변으로 이를 비껴가려 했다.
지적 능력과 인문적 소양의 부족을 드러내기는 윤석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다 부인을 둘러싼 의혹에는 거짓 해명으로 일관했으며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나오는 등 비상식적인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국가경영이라는 대임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게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공정과 상식’이라는 그의 기만적 구호에 현혹된 국민들은 0.73%포인트 차이로 그를 선택했다.
TV토론을 통해 누가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 될지를 정확히 가려내기는 쉽지 않지만 대통령이 되기에 문제가 있는 인물을 감별해 낼 수는 있다. 집중력을 갖고 토론을 지켜보면 후보들의 지적인 소양과 현안들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기본적인 정서 능력은 갖추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변호사’가 아닌 ‘판사’의 시선으로 토론을 지켜보는 이런 유권자가 20%만 돼도 국민들의 집단적 선택이 실패할 가능성은 크게 낮아질 것이다. 당신은 어떤 유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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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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