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부활절을 앞둔 성 금요일(Good Friday), LA 디즈니 콘서트홀은 낯설지만 가슴 따뜻해지는 숨결로 채워졌다.
이날 무대를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하자면, 형식 파괴, 뿌리에 대한 존경, 그리고 경계를 넘는 장르 개척이라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무대를 봤다면 그것은 정작 무대를 찾지도 않는 이들의 게으른 허세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두다멜이 지휘봉을 잡은 LA 필하모닉의 첫 곡은 미국의 대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의 ‘희유곡(Divertimento)’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곡은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 자유로운 형식의 8곡짜리 유쾌한 오케스트라 모음곡이다. 클래식, 재즈, 행진곡, 춤곡 등 서로 무관해 보이는 스타일의 곡들이 이어지며 연주되니, 바로크나 고전주의 음악에 익숙한 청중에게는 다소 낯설고 완성도가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곡은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창단 100주년 기념해 작곡된 축제곡으로, 다양한 음악적 흥겨움을 담고 있으며, 클래식의 대중적 접근을 확장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어 무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Randall Goosby)가 연주한 플로렌스 프라이스(Florence Price)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흑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음악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작곡가 프라이스의 음악에는 정통 클래식 양식에 흑인 영가, 블루스, 그리고 민요적 정서가 스며들어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구스비는 다양한 문화적 뿌리를 갖고 있는데, 그의 섬세하고도 강한 음색은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선언 같았다. 특히 흑인 전통 음악에 대한 그의 오마주는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구스비는 이날 앵콜곡으로 그의 앨범 ‘Roots’에도 수록된 콜리지-테일러 퍼킨슨(Coleridge-Taylor Perkinson)의 2002년 작 ‘Louisiana Blues Strut: A Cakewalk’를 연주했는데, 블루스와 케이크워크(미 남부 흑인 노예들의 춤에서 유래한 음악) 리듬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스타일로, 무엇보다 구스비의 뿌리를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였다.
이어 2부의 ‘굿 뉴스 미사곡(Good News Mass)’은 기대를 뛰어넘는 감동의 하이라이트였다. LA 필하모닉이 위촉해 초연한 이 21세기형 교향시는 작곡가 카를로스 사이먼(Carlos Simon)이 가스펠과 클래식, 낭독 시를 결합한 가시적 공동체 예술이다. 45분 동안 낭독자와 두 명의 가수, 합창단, 영상이 어우러지면서, 기타, 피아노, 오르간, 드럼까지 합세한 오케스트라 반주로 생동감 넘치는 ‘미사 형식 무대극’을 완성했다.
특히 Jason White and The Samples의 협연으로 오케스트라와 합창 지휘자가 모두 무대에 선 보기 드문 장면은 자유로운 몸짓으로 노래하는 합창의 감성을 더욱 극대화했다.
원래는 가스펠 스타가 맡을 예정이던 소프라노 파트를 테너 음역으로 재해석했는데, 어떤 이유로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부활절을 앞둔 성 금요일의 디즈니홀은 흑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모두의 상처가 위로받고 치유되는 공간이 되었다. 내년에 LA 필을 떠나는 두다멜은 이날 공연으로 클래식의 미래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무대를 선사했다.
이렇게 창의적이고 다양화되어 가는 세계 클래식 무대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그 안에 우리의 색을 어떻게 더하고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글로벌 시대의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의 정서를 전수하기 위해 국악과의 협업도 분명 의미 있지만, 그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작곡가들이 우리의 정서를 서양 음악의 언어로 낯설지 않게 풀어내고, 세계 무대에 선 한국 연주자들이 그 음악을 더 자주, 더 자연스럽게 전할 때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으로 더 깊이, 더 넓게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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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ㆍ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