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란 맘다니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 [로이터]
인도계 무슬림인 정치 신인 조란 맘다니(33)가 지난달 실시된 뉴욕시장 예비선거에서 거물 정치인 앤드루 쿠오모(67) 전 뉴욕주지사를 큰 표차로 꺾고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것은 말그대로 정치적 이변이었다.
뉴욕시가 임대료 관리 권한을 가진, '임대료 안정화 아파트'의 임대료 동결을 비롯해 최저임금 인상, 무상버스, 무상보육 확대 등이 그가 내건 핵심 공약이었다.
이 같은 그의 정책을 두고 공화당이나 재계에서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강한 비판이 나오는 것은 물론 민주당 내에서조차 그의 정책이 급진적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맘다니가 고물가에 시달리는 뉴욕 서민층의 생활 형편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정책 공약을 내걸고 거물 정치인을 꺾었다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하지만 맘다니의 승리에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미국 정치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유대주의'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미국 정치에서 암묵적으로 유지돼 온 '레드라인'이 효력을 잃고 있다는 신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 정치인들에게 이스라엘 정부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거나 '친(親)팔레스타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친이스라엘 로비 그룹들의 강력한 낙천·낙선운동이 뒤따르고, 이는 실제 선거에서 낙선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연방하원의 재선 현역 의원이었던 자말 보먼(민주·뉴욕주) 전 의원이 지난해 6월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낙천운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던 게 대표적인 최근 사례다.
보먼은 미 의회 내에서 가자지구 전쟁 중단을 촉구하고 이스라엘 정부에 공개적으로 비판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친이스라엘 로비단체인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관련 슈퍼팩(Super PAC·정치자금 모금 단체)은 지난해 보먼 전 의원 지역구의 예비선거 기간 보먼 낙천운동에 약 1천400만 달러(약 195억원)의 광고비를 지출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먼에 대한 낙천 광고비에 대해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싼 하원의원 예비선거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보먼과 함께 하원에서 이스라엘 비판 입장을 견지해 온 코리 부시(미주리) 전 의원 역시 AIPAC의 타깃이 돼 작년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AIPAC은 부시 낙천 캠페인에 900만 달러(약 125억원)를 썼는데, 미 하원의원 예비선거 역사상 두 번째로 비싼 선거운동이었다.
맘다니는 미국 내에서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反)유대주의에는 강한 반대 입장을 표하면서도, 현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유대인 인구 비중이 큰 뉴욕에서 맘다니가 친이스라엘 단체들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유대인 단체들은 예비선거 운동 기간 맘다니가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의 세계화'라는 구호에 대해 명확한 규탄 의사를 표하지 않은 점을 부각하며 강도 높은 낙선운동을 벌여왔다.
이는 각 후보 관련 슈퍼팩 자금 지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번 예비선거 기간 선거캠프가 직접 쓴 지출액을 제외하고 슈퍼팩을 통해 쿠오모를 지지하거나 맘다니를 반대하는 데 지출된 비용은 약 2천600만 달러(약 360억원)에 달했다. 맘다니 관련 슈퍼팩 지출액은 180만 달러(약 26억원)에 불과했다.
쿠오모를 지지하는 슈퍼팩인 '픽스 더 시티'의 경우 이번 예비선거에서 쿠오모 지지 홍보에 약 1천500만 달러를 지출했고, 맘다니 반대 홍보에 800만 달러를 지출했다.
이 슈퍼팩에는 마이클 블룸버그(880만 달러), 빌 애크먼(50만 달러) 등 뉴욕의 친이스라엘 성향 갑부들이 거액을 기부했다.
쿠오모는 예비선거 후보자 토론에서 맘다니가 뉴욕시장에 당선되더라도 이스라엘을 방문할 계획이 없다고 답한 것을 부각하기도 했다.
뉴욕시는 미국 내에서도 유대인 인구 비중이 높은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기준 뉴욕시의 유대인 인구 비중은 약 12%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모든 뉴욕시장은 이스라엘을 방문해왔다.
맘다니의 예비선거 승리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큰 뉴욕시에서조차 친이스라엘 행보가 무조건적으로 '승리 전략'이 아니게 됐음을 시사한다.
또한 AIPAC 등 친이스라엘 로비단체의 영향력이 도시의 젋고 진보적인 유권자를 중심으로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PAC과 같은 유대인 로비단체들은 설립 초기만 해도 인류가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종말살을 막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라는 그들의 구호가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 전체 미국 사회에서 공감을 얻고 울림을 준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도주의적 비극은 유대인 단체의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게 된 주된 배경이 됐다.
설문 조사를 보면 가자지구 정책과 관련해 유대인 내 젊은 세대들조차 이스라엘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인식 변화의 조짐은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도 감지된다.
대표적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정치인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공화·조지아)은 최근 인터뷰에서 AIPAC과 같은 친이스라엘 단체를 외국인 단체로 등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AIPAC과 같은 로비단체를 통해 이스라엘이 미국 정치와 정책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이 미국 강경 보수 진영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선거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신중해야 하지만, 예비선거 승리와 AIPAC의 영향력 약화 조짐은 미국 내 한국 교민사회는 물론 한미관계에도 어느 정도 시사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특정 민족 정체성을 지닌 집단이 광범위한 지지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지 않고 막강한 자금력과 로비력를 통해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할 경우 단기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긴 어렵다는 사실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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