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찰스턴 법원에서는 수요 성경공부 중이던 흑인교회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 9명의 목숨을 앗아간 백인 우월주의 청년 딜런 로프(21)의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약식재판이 열렸다.
재판정 대형 스크린에는 구치소에 수감된 범인 로프가 화상 전화로 연결됐다. 재판에 참석한 유족들은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관행에 따라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범인에게 말을 건넸다. 유족들의 얼굴은 범인에게 공개되지 않았지만, 유족들의 목소리는 범인에게 중계됐다.
“내 살점 하나하나(every fiber in my body)가 다 아프고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너를 용서한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콜로라도 극장 난사 사건이나 샌디 훅 초등학교 난사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미전역에 총기 규제 논란을 또 다시 점화시킨 이 사건은 희생자의 유족들이 용서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울림과 파장이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진하게 번져나가고 있다.
2년 반 전쯤이던가, 며칠 일정으로 찰스턴을 다녀온 적이 있다. 친한 친구의 아들이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방문했던 것인데, 선남선녀가 백년가약을 맺는 뜻 깊은 예식에 참석한다는 즐거움도 컸지만 남부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남북전쟁의 발발지를 보고 싶은 호기심도 컸었다.
1670년 당시 영국 국왕이던 찰스 2세의 이름을 따 찰스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는 이 도시는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면화의 주요 적출항이었다.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탓에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미시시피의 내처즈(Natchez)와 함께 남부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서기도 했었다는 데, 찰스턴 해안가에는 그 당시의 검역소와 세관이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옛 위용을 간직한 채 서 있었다.
배에 싣고 온 노예를 부려놓던 현장을 직접 보는 느낌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결혼식은 아름다운 애쉴리 강이 뒤쪽으로 흐르는 한 플랜테이션의 맨션(지금은 개조하여 연회장소로 대여한다)에서 거행되었는데, 우아한 귀족풍의 맨션을 돌아보며 오히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노예들의 삶이 떠올랐다.
이곳 흑인들이 선조들이 노예선에 강제로 태워지고 끌려와 짐짝처럼 부려지던 그 바닷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너무 오래 전의 일들이라 그냥 무덤덤하게, 하나의 풍경처럼 지나치며 살고 있을까, 혹은 그 당시 선조들의 비극을 자신의 비극으로 받아들이며 암암리에 원망과 증오를 품고 살아갈까. 아마 어느 순간은 전자일 것이고 또 다른 순간에는 후자이리라.
찰스턴에서 사건이 터졌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남다르게 다가왔던 것도 아마 그 곳에서의 인상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서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았던 흑인들은(물론 여행길에 한두 번 스친 데 불과하지만) 시카고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마주치는 흑인들과는 달랐다. 뭐랄까 훨씬 온순하고 순박한 인상을 풍겼다.
처음 “용서 하겠다”는 유족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 것이 사실이다. 용서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삭혀진 다음에, 많은 갈등과 내적 투쟁을 거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교인들이 너무 친절해서 범행을 그만둘까 했었다”는 범인의 말에 어쭙잖은 회의는 사라지고 가슴이 울컥해졌다.
이번 사건을 보며 정작 불쌍한 사람은 오히려 딜런 로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우정과 연대를 함께 다질 공동체도,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신앙도 없었을 테니까. 아마도 신심이 깊은 유족들은 한 눈에 이를 꿰뚫어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도 품위와 선함이 빛난다”고 말한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이번 사건에서는 커뮤니티의 성숙함이 오롯이 빛나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