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지만, 나는 교수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교수는 연구하는 사람이고 강의는 부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80년대에 한국에서 다닌 대학교에서 만난 교수의 모습이나 90년대에 미국에서 다닌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의 모습이 그랬다. 교수가 가르치는 직업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교수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상 교수가 되고 나서 보니 교수는 가르치는 직업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법, 연구하는 법에 대해서는 피눈물 나게 배웠지만 가르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배운 대로 가르쳤다. 내가 배운 교육 방식이란 ‘군사부일체’라는 조선시대 생각과 군사정부가 이끄는 군대식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일방적, 강압적, 주입식 교육이다. 물론 미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나는 학생들을 때리고 윽박지르지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교수의 모습은 ‘위’에서 ‘아래’에 있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면서 ‘권위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한 수업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정보를 모두 전달하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빽빽하게 떠들고, 많은 과제물을 내었으며,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은 하나하나 검사하면서 고쳐야 할 것을 빼곡히 알려주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질문하면 수업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워서 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내 교육법은 잘못된 방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좀 더 효과적인 강의법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 긍정적인 교육법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잘하는 부분을 짚어내어 칭찬하고 ‘못하는 부분’이 아니라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교육법이다. 못하는 일을 혼내고 다그쳐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일을 드러내어 칭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교육법이었다.
칭찬할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틀린 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개선할 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잘한 부분을 이야기하자고 결심한 나는 시작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나는 칭찬하는 것이 어렵다. 어쩌다 한두 번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어렵다.
나는 칭찬에 극히 인색한 문화에서 자랐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집에서도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주목했다. 아무 말이 없으면 잘한다는 뜻이었다. 언급된다면, 주목받는다면, 그것은 틀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교수가 되어서도 그 프레임을 그대로 지켰다. 학생들의 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줄 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지적할 사항이 없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훈련된 매의 눈으로 잘못한 점을 찾아내기는 쉬웠다. 하지만 뻔하게 잘한 부분을 칭찬하고 나면 딱히 칭찬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칭찬할 거리를 찾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강아지를 키우는 요즘 칭찬에 대해 새롭게 느낀 점이 있다. 강아지에게도 긍정적 교육법을 따르고 있으니 잘한 일을 칭찬하고 못한 일은 무시하거나 무심하게 주의를 환기한다. 그런데 강아지를 칭찬할 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린다.
누우라고 하면 눕는다.
앉으라고 하면 앉는다.
발을 내밀라고 하면 발을 내민다.
똑같은 일이라도 매일 칭찬한다. 우리의 하루는 강아지에게는 일주일일 수도, 한 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똑같은 일이라도 하라는 행동을 하면 할 때마다 하루에 몇 번이라도 처음 보듯 칭찬한다.
그래도 모자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강아지에게 잘하고 있다는 메시지만 전달하려니 칭찬할 거리를 찾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날 눈에 띄지 않지만 잘하고 있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에 띄지 않지만 잘하고 있는 일이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을 때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문이 열리면 뛰어나가지 않는다.
산책하면서 앞서지 않는다.
다른 개가 지나가면 짖지 않는다.
자동차가 옆을 지나는데 뒤쫓지 않는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칭찬하니까 칭찬할 거리가 쉽게 불어났다. 무엇인가를 잘하면 칭찬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칭찬하다 보니, 문득 내 학생들이, 아니 주변 사람들이 눈에 띄게 잘하고 있는 일에만 칭찬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잘하는 일까지 찾으면 칭찬할 거리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잘못을 집어내는 만큼이나 칭찬할 거리가 눈에 띄려면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칭찬할 결심으로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대충 보아서는 안 된다. 매의 눈은 오히려 칭찬에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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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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